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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초반까지의 네덜란드는 여러 공국과 백작령, 주교령 등으로 복잡하게 나뉘어져 있었는데, 15세기 중반 프랑스 북동쪽을 지배하고 있던 브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3세가 점차 세력을 넓혀서 홀란트, 젤란트, 에노, 브라반트, 림뷔르흐 등 네덜란드의 절반이 넘는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필리프 3세의 손녀인 마리 드 부르고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게 되는 데요. 부르고뉴가는 합스부르크가와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네덜란드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지만,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였던 네덜란드 인들에게 합스부르크는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펠리페 1세인데, 펠리페 1세는 스페인의 공주 후아나 라 로카를 아내로 맞이하고 후아나가 낳은 아이가 바로 카를 5세로, 카를5세는 태어나자마자 부르고뉴 공작의 지위를 수여 받았고, 16세가 되던 1515년부터 네덜란드의 총독에 오르게 됩니다.

 

이듬해인 1516년 스페인의 페르난도가 사망하여 스페인 국왕에 즉위하였고, 1519년에는 막시밀리안 1세도 세상을 떠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차지하게 되면서 광활한 영토를 가진 왕이 되죠.

 

1517년 발생한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카를 5세는 루터파와의 전투 끝에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맺어서 루터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155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서 물러날 때 신성로마제국은 동생인 페르디난트1세에게 물려주었고, 스페인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 줍니다.

 

이때 네덜란드의 영토 역시 둘로 나뉘었는데 동부는 신성 로마 제국에 서부는 스페인에 각각 속하게 됩니다. 이때 홀란트주가 스페인 왕국에 속하게 되면서 펠리페2세의에 통치를 받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스페인과 홀란트의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불씨가 되는 중요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세금 문제입니다 .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 5세 때부터 이탈리아 지배권을 두고 지속해온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에 영구적인 조세제도 확립을 원했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영구적인 세금징수에 반발하면서 일정기간동안 일정 금액만을 징수할 것을 요구하여 갈등이 발생 하였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네덜란드도 강력한 왕의 통치 하에 있는 것이 자국의 안위에 더 좋다라는 것을 알고 세금을 낼 용의가 있었다 라는 것이죠. 다만 과도한 세금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종교 문제 입니다. 아버지 카를 5세 도 1521년부터 루터교를 금지시키고, 종교 재판소도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옮기며 개신교를 탄압한 역사가 있었지만, 펠리페 2세에 이르러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되어, 1566년 개신교도들은 카톨릭의 상징인 교회와 성상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펠리페 2세 로써는 이 사태를 두고볼 수 없었고, 스페인에 군대를 파견하기에 이르죠. 이때 네덜란드로 온 사령관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내 개신교도들을 섬멸한 경험이 있는 알바공작이었습니다.

 

1566년 네덜란드에 도착한 알바 공작은 2년만에 전권을 잡고 저항 세력을 처형하였는데 '피의 법정' 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저항 세력을 숙청하였고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역시 반격에 나섰는데 1568년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오라녜 공 빌렘이 헤일리게레 전투에 승리하면서 향후 80년간 지속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헤일리게레 전투 이후 전투에서 승전과 패전을 거듭하던 양국은 1573년부터 1574년까지 진행된 레이덴 포위전에서 빌렘이 강 상류의 뚝을 터트려 레이덴을 물바다로 만든 뒤 배를 타고 공격해 들어가는 전술을 사용하며 스페인 군을 몰아 내게 되는데요. 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이때부터 알바 공작이 빌렘과 협상을 진행 하기 때문이죠.

 

이후 1576년에 겐트에서 네덜란드 각 주들이 강화 조약을 체결하면서 스페인이 네덜란드의 칼뱅파 개신교를 인정할 것과 스페인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강화 조약에 동의 하였지만 스페인의 군대는 철수 하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펠리페 2세는 자신의 이복동생 이며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돈 후안 아우스트리아를 총독으로 불러들이지만 그는 곧 병사하게 되고 전 총독이었던 마르가리타와 파르마 공작 사이에서 태어난 알레산드로 파르네세가 총독이 되어 네덜란드 분열 정책을 펴게 됩니다.

 

즉, 1579년에 스페인 군대 철수를 약속하며 남부 네덜란드의 귀족들과 카톨릭 동맹인 아라스 동맹을 맺은 것이죠. 남부는 곧 파르네세의 통제권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북부는 개신교 동맹인 위트레흐트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때 갈라진 남북의 정치 세력은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581년 7월 오라녜 공 빌렘의 노력으로 네덜란드 북부 7개주 대표들이 헤이그에 모여 연방법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향후 스페인의 통치를 거부하고 네덜란드를 독립시키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1584년에는 빌렘이 프랑스 청년에 의하여 암살 당하게 되는데, 빌렘 사후에 북부 네덜란드를 이끈 사람은 빌렘의 아들인 마우리츠였습니다.

 

네덜란드는 당시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앙리 3세에게 네덜란드 연방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전쟁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한 앙리 3세는 이를 거부하였고, 반면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레스터 백작을 네덜란드 총독으로 파견합니다.

하지만 레스터 백작의 개혁 정치는 네덜란드 의회와의 갈등을 발생시켰고, 결국 1587년 레스터 백작은 영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레스터 백작에 맞서 싸운 사람이 홀란트 주의 대의장 올덴바르네벨트이고, 의회는 더 이상 자국의 운명을 다른 나라에 맡기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마침내 네덜란드는 타국에 지배를 받지 않는 진정한 연방공화국이 된 것이죠.

 

이 1588년은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엘리자 베스 1세에게 처참히 패해서 대영 제국의 기초가 된 해 이기도 하며 이듬해인 1589년 프랑스에서는 앙리 4세가 부르봉 왕가를 개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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