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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독일은 9개의 국가와 사방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이웃나라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독일의 국력이 강해지면 유럽의 중심이 되고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 강대국의 먹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더 강해진다는 잠재의식으로 집결한 독일은 유럽에서의 위상을 높여가게 됩니다.

 

외유내강의 상징, 독일의 역사는 고대 게르만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주 오랜 옛날, 유목 생활을 하던 게르만인들 중 일부가 갈리아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이 게르만인은 곳곳에 많은 왕국을 세웠고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나라가 프랭크 왕국이었어요.

 

 

전성기를 누린 프랑크 왕국에서 카를 루스가 죽자 그의 세 손자가 권력 다툼을 일으켜 나라가 3분할되었습니다. 서프랑크는 나중에 프랑스, 중프랑스는 이탈리아, 동프랑스는 현재 독일의 기원이 됩니다. 당시 동프랑크에는 작센, 슈바벤, 프랑켄 등 매우 많은 공국을 세웠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강했던 것이 슈바벤 공국이었습니다.

 

그래서 919년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고요. 이 무렵부터 동프랑크 왕국은 독일 왕국이 됩니다. 왕이 된 하인리히 1세는 두 가지 공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일생분의 노력으로 모든 공국을 단결시키고 마자르인의 침입을 막았다는 점이고요. 두 번째는 위대한 인물인 그의 아들 오토를 낳은 것입니다. 936년 하인리히 1세가 죽고 오토가 그 뒤를 잇는데 오토는 여러 번의 반란을 잠재우고 지금의 헝가리인 마자르의 침입을 완전히 막았습니다. 후세사람들은그공적을기려서오토대제라고부릅니다.

 

오토 대제는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는다는 큰 목표를 세웁니다. 961년 타이밍 좋게 이탈리아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 패한 로마 법정이 오토 대제에게 파병을 요청합니다. 오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병해 승리합니다. 962년 오토에게 도움을 준 나머지 요한 12세는 오토 대제에게 로마 황제 칭호를 내렸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신성로마제국이 시작됩니다. 이 무렵부터 약 840년간, 독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불렸습니다.

 

1077년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자의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인리히 4세가 결국 카놋사성에서 교황에게 굴복하게 된다 이게 카놋사 사건입니다. 이후에도 교황과 황제 사이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며 결국 교황이 승리하면 황제의 권력은 약화됩니다.

 

이후 독일 제후들의 왕위쟁탈전이 이어지면서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가 다시 돌아갔습니다. 독일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혼란스러운 내부 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평생 이탈리아를 6번 침공하는데, 붉은 수염을 뜻하는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 후 바르바로사의 다재다능한 손자 프리드리히 2세가 돌아왔습니다. 이후 독일의 왕이 되는데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 예루살렘 왕, 이탈리아 왕, 부르고뉴 왕이 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수많은 왕관을 나란히 감상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요.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위에 오른 후계자는 야심찬 제후들을 누를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독일 역사에서 아주 유명한 시기가 시작됩니다. 1254년부터 1272년까지 독일에는 왕이 없거나 있어도 명분밖에 없는 왕이 선출된 이후 왕좌가 빈 대공위시대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273년 루돌프 1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면서 대공위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후들이 일부러 힘이 약한 루돌프 1세를 꼭두각시로 앉힌 것이기 때문에 이후에도 제국은 분열의 연속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중세에는 독일왕과 교황 간에 100년에 걸친 다툼이 이어졌습니다. 양자가 승패를 주고 받았어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독일을 덮칩니다.

 

그 운동을 이끈 것은 독일 농민의 아들 마르틴 루터입니다. 어느 날 부패한 교황청이 신도들에게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기 시작합니다. 누구든 살인과 강도를 저질러도 이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죄를 용서하신다며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 거죠. 

 

 

이에 분노한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궁전 교회 출입구에 95개조의 반론을 펼치고 교황청을 비판합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교회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마르틴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고 명령합니다 당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솔선수범하여 마르틴 루터를 보호합니다. 1520년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출판했고, 이 책은 불티나게 팔리고 루터는 영웅이 됩니다.

 

분노를 억누르고자 한 교황은 마르틴 루터에게 참회하라는 조서를 보냅니다. 마르틴 루터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많은 사람 앞에서 이 조서를 불태워 버립니다. 이 용감한 행동을 본 독일인은 교회의 억압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민중의 눈치를 살피던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루터의 죄를 물을 것을 요청하며 루터는 결국 발트부르크성에 피신하게 됩니다.

 

1543년 피신했던 마르틴 루터가 드디어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서가 완성됩니다. 그가 불지른 종교개혁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고 황제 카를 5세가 이러한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신교도를 탄압하면 30년 전쟁이 발발합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대립, 정치적 모순이 순식간에 폭발한 싸움이었습니다

 

점차 유럽의 주요국들이 참전하면서 유럽 전체가 거대한 전쟁터로 바뀝니다. 30년 전쟁 동안, 그 전투는 항상 독일에서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와 스웨덴 군대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자,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가톨릭교도 제후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교국가의 화해를 제의합니다.

 

1648년 참전국 모두가 베스트팔렌 조약에 조인하면서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나 스웨덴 같은 전승국은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독일은 전쟁 배상금 같은 부채를 안고 영토 곳곳에 시체로 뒤덮인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독일 경제는 붕괴 직전에 정치적 분열까지 심각해집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수백 개의 나라에서 해체되고 사실상 황제라는 지위도 밖에 존재하게 됩니다. 한편,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가장 급속히 성장한 독일 영방 제후국이 프로이센입니다. 1525년에 세워진 프로이센 공국이 점차 득세하더니 1701년 마침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왕위를 인정받았고,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1709년 베를린을 수도로 합니다.

 

1713년, 군인왕으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제2대 왕이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매우 검소하고 근면하며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성품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이후의 독일인들의 성격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를 '프로이센의 정신'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을 무렵에 프로이센은 이미 유럽대륙에서 일류국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가 잘 닦아놓은 군사력을 활용해 오스트리아와의 슐레지엔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합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는데요, 귀족의 자제뿐만 아니라 평민의 자녀에게도 의무교육을 시키고, 거액의 장학금을 받아 프로이센인들이 과학을 탐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는데 프리드리히 2세의 이런 생각은 독일인들의 사고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오늘날 독일인들도 교육과 과학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프리드리히 2세가 국내 정무를 돌보는 동안 유럽 한편에서는 프로이센을 꺾기 위한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러시아가 똘똘 뭉쳐 남, 서, 동쪽 사방에서 프로이센으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침착하게 영국과 동맹을 맺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앞잡이 작센을 공격합니다. 이렇게 7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1762년 러시아 여제 예리자베타가 세상을 떠나고 표트르 3세가 황위에 올랐습니다. 이표트르3세는 평소 프리드리히2세를 신처럼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를 돕고 싶어했어요. 결국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전투를 중단시키고 함께 싸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단번에 배신합니다.

 

졸지에 편을 든 러시아와 힘을 합친 프로이센은 위기에서 벗어나 7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누어 가지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함으로써 유럽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은 프로이센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나라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유럽 역사에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1806년 천년의 역사를 이어온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프로이센 역시 타격을 입습니다.

 

 

이후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교묘하게 전장을 이끌면서 오스트리아를 무찔렀어요. 이어 유럽 최고의 군대였던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까지 격파하여 독일의 통일을 이룩합니다. 프랑스를 이긴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교외에 있는 베르사유로 진군하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제국을 선포합니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등극한 빌헬름 1세를 보좌하는 데 주력하여 독일 경제 재건을 추진했습니다. 독일은 점차 유럽의 강대국으로 변모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9세에 황제가 된 빌헬름 2세가 권력을 잡고 비스마르크를 견제하여 결국 비스마르크를 몰아냅니다. 모험심이 넘치는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국제적인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이 팽팽한 유럽 각국의 긴장으로 인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웠고 1918년 독일 제국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1919년 전쟁의 폐허 위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이 공화국은 독일에서 처음으로 공화정과 민주주의를 실시합니다. 1933년에 나치가 제 1 정당으로 집권할 때까지 계속합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 시련을 겪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입니다. 그러나 1923년에 천재지변과 같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서 독일 통화 마르크화의 가치는 휴지조각이 됩니다. "많은 독일인들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하여 전 재산을 잃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실직하고, 국가 경제가 붕괴됩니다" 이렇게 바이마르 공화국이 쇠퇴의 길을 걸을 때 독일 노동당이라는 단체가 바이에른 지역에 설립되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단체에 나치스(Nazi)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던 히틀러가 크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죠. 전쟁이 끝난 후 육군 정치부 정보국에서 일하던 히틀러가 독일 노동당의 집회에서 뛰어난 연설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히틀러가 입당을 결정하게 된 순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독일노동당 당원이 된 그는 극적인 표정과 연극 톤의 목소리로 수많은 독일인들의 감정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는 당의 이름을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나치당의 나치당이 됩니다.

 

히틀러는 생활에 시달리면서 지친 독일인들의 마음을 '빵과 일을 한다'는 말로 빼앗아 갑니다. 결국 정치권을 장악한 히틀러가 제3제국을 선포하고 나치 독일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독일은 독재자의 치하에 들어갑니다.

 

1939년 히틀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은 인종청소를 근거로 수백만이 넘는 유대인을 비롯한 민간인과 전쟁 포로를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전쟁에 미쳐있던 독일은 연합군의 총반격으로 궁지에 몰렸어요.

 

히틀러는 그의 관저 지하벙커에서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하 벙커는 4m 두께의 콘크리트로 건축되었고 깊이는 15m에 달했어요.

 

1945년 4월 27일 소련군이 지하 벙커가 있는 베를린 시내 바로 앞까지 진격해 들어옵니다. 4월 28일, 히틀러는 12년을 함께한 연인 에바 브라운과 지하벙커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비서에게 자신의 유서를 썼습니다. 4월 30일 소련군이 도로를 하나 남긴 지점까지 진격해 오자 히틀러는 침실로 들어가 권총을 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5월 2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고 소련기를 들자 30만 독일군은 일제히 무기를 내립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항복하면서 유럽을 메운 폭격기들의 굉음과 비명소리가 마침내 잦아듭니다.

 

이후 전승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공정한 재판을 통해 나치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만천하에 폭로하기로 합니다. 역사적인 재판에서 나치 고위 관리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만, 전원 유죄가 되고, 벌을 받게 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대 전승국은 독일을 나눠 점령하게 됩니다. 결국 독일은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서독과 공산주의 정부에 의한 동독으로 나뉩니다. 이후 서독은 미국의 경제 원조와 시장경제 체제를 통해 획기적인 경제 발전을 이룩합니다.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동서 베를린 경계에 베를린 장벽을 쌓습니다. 이 장벽의 규모는 길이가 160km에 달하고 밖에는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감시탑 300여 개, 경비견 600여 마리, 군인 14,000여 명을 통해 장벽 주위를 철저히 감시합니다.

 

시간이 지나 동독 경제가 추락하고 통일의 열망이 커지자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룩합니다. 이렇게 독일인의 환호 속에 독일연방공화국이 탄생한 이래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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