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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문

포르투갈 역사 간단 요약

스노브 2022. 1. 18.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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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에 약 40만년 전부터 인류가 살고 있었고 기원 전 12세기경에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습니다. 기원전 8세기-6세기 경에는 유럽의 켈트족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왔고, 기원전 7세기 경에는 그리스,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카르타고가 이베리아 반도의 해안가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카르타고의 영향력은 기원전 264년부터 시작된 로마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하며 상실되었고 로마는 본격적으로 이베리아 반도 정복에 들어갔습니다. 현재 포르투갈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켈트계의 루시타니아인들은 기원전 155년부터 비리아투스 장군이 활약하며 로마에 저항했지만 비리아투스 장군이 측근에게 암살당하며 전세가 기울어져 기원전 139년에 로마에 정복당합니다.

 

로마는 기원전 19년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정복했고 이 후 약 400년 간 이베리아 반도를 로마화시킵니다.

 

5세기 초 훈족에 쫓겨 정착할 땅을 찾아 게르만족인 수에비족과 반달족, 이란계 유목민족인 알란족이 이베리아 반도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426년부터 게르만족인 서고트족이 이베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높이기 시작했고 475년 로마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습니다.

 

서고트 왕국은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힘이 약화되었고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건너온 이슬람 세력인 우마이야 왕조의 침략을 통해 순식간에 멸망당합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의 북부 산악지대는 끝까지 정복하지 못하는데요. 718년 서고트 왕국의 장군 펠라요가 기독교 세력을 규합해 이슬람 세력의 공격을 막아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웁니다.

 

868년 아스투리아스 왕이 자신의 가신인 비마라 페레스를 포르투갈렌스의 백작으로 봉했고 포르투갈렌스 백작령은 포르투갈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후에 레온 왕국, 갈리시아 왕국, 카스티야 왕국으로 분화되었는데 레온, 갈리시아, 카스티야의 왕인 알폰소 6세는 무어인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서십자군의 기사 동 엔히크를 1096년에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포르투갈렌스 백작으로 봉합니다. 동 엔히크의 아들 동 아폰수 엔히크(아폰수 1세)는 무어인들과 전쟁을 진행하면서 레온-카스티야로부터 1139년에 독립을 선언했고 1143년 독립을 인정받았습니다.

 

1249년 포르투갈은 알가르베까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어 스페인보다 약 250년 일찍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를 완수했습니다.

 

1279년 왕위에 오른 동 디니스 왕은 포르투갈 왕국을 발전시켰고 특히 해운업의 기반을 닦아 후에 15세기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전성기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383년 페르난두 1세가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이 사망했고 카스티야의 왕 후안 1세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때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동 주앙이 '포르투갈 왕국의 섭정과 수호자'의 직책으로서 카스티야의 침략을 막아내 독립을 지켜냈고 1385년에 왕으로 정식 추대되어 제 2왕조인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계속되는 카스티야의 침략을 막아내어 독립을 완전히 지켜낸 주앙 1세(동 주앙)는 1415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 정복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왕국의 해외 진출을 본격화시켰습니다. 당시 유럽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향료 교역이 엄청난 이득을 주던 시대였는데 포르투갈은 육로로는 스페인이 버티고 있었고 지중해는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며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통한 해외 진출을 시도했죠. 그런 측면에서 주앙 1세의 아들 동 엔히크 왕자의 해외 탐험 및 정복 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의 섬들과 서아프리카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점차 남아프리카로 항로를 넓혀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484년 콜럼버스가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를 찾아와 서쪽 항로 개척을 제안하지만 포르투갈은 당시 아프리카를 지나는 동쪽 항로에 관심이 있었기에 주앙 2세는 그 제안을 거절합니다.

 

1487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해 1488년 아프리카 남쪽 끝인 '희망봉'을 발견했고 이는 새로운 아시아 항로를 개척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1492년 이웃 국가 카스티야는 콜럼버스를 지원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앙 2세가 알카소바스 조약(1479년에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이 영토와 관련해 맺은 조약)을 근거로 교황에게 항의했고 두 국가는 1494년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가지자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게 됩니다.

 

1497년 바스코 다가마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동행하여 탐험을 시작했고 1498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해 포르투갈과 아시아의 첫 항로를 개척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1500년에는 브라질, 1509년 말라카, 1513년 마카오를 발견하는 등 활발한 해외 확장 사업이 진행됩니다.

 

1522년 마젤란의 탐험대가 세계 일주를 성공하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증명되었으며 그리하여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보완해야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하나만 그어서는 세계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었죠.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529년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그어진 선에서 선을 하나 더 그어 세계를 나눠가졌는데 필리핀은 예외적으로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530년에 브라질을 식민지 로 만들기 시작했고 1538년 브라질에 총독부를 설치합니다. 이렇듯 활발한 영토 개척과 아시아의 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리던 포르투갈은 16세기 후반 영국과 네덜란드와 같은 경쟁자들이 성장하면서 향료 교역으로 얻게 되는 이익이 감소되었고 해외 식민지를 지키는 데 많은 비용과 국력이 소모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결정적으로 1578년 모로코 정벌을 떠난 왕과 다수의 귀족들이 목숨을 잃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결국 1580년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한 스페인의 침략을 막지 못해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신세가 되었죠.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 포르투갈은 스페인이 참전한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 원치 않는 피해를 받아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박살낸 영국과 신흥 강국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의 해외 거점들을 계속해서 빼앗아갔습니다. 힘이 약화된 것은 포르투갈만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역시 잦은 전쟁과 영국, 네덜란드의 성장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재정은 점점 악화되어갔습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줄이고 높은 세금을 부과해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에 반발하는 감정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1640년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포르투갈도 같은 해에 반란을 일으켜 브라간사 공작인 주앙 4세를 왕으로 추대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습니다.

 

독립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쟁(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1659년) 중이었기에 독립이 가능했지만 전쟁이 마무리 된 후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침략을 막는 데 국력을 소모해야 했고 동시에 해외 거점도 지속적으로 상실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강대국과의 적대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문호를 개방하고 강대국과 혼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왕가와의 혼인을 통해 맺은 동맹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1701년에 발생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년)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쳐지는 것이 두려웠던 다른 나머지 국가들이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쟁에서 포르투갈은 프랑스편이었다가 1703년에 반대편으로 넘어갔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줄을 잘 탄 포르투갈은 실리를 챙겼고 비슷한 시기에 브라질에서 많은 양의 금이 발견되어 포르투갈로 유입되면서 경제에 숨통이 트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1755년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리스본의 85%가 파괴되었으나 폼발 후작의 노력으로 리스본은 재건되었고 현재 리스본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1789-1794년)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포르투갈은 영국이 속해 있던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는데 같은 편이었던 스페인이 1795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고 1801년에는 포르투갈을 침공해 포르투갈은 올리벤사를 내주었습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 패배한 프랑스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지만 포르투갈이 이를 지키지 않자 1807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습니다.

 

포르투갈의 여왕 도나 마리아와 아들 동 주앙(후에 주앙 6세)을 비롯한 귀족들은 브라질로 도망쳤죠. 1808년 영국이 갈리시아에 상륙하여 포르투갈과 힘을 합쳐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섭정 동 주앙은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고 브라질을 식민지에서 연합 왕국의 지위로 격상시켰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지속적으로 주앙 6세에게 돌아올 것을 요구했고 결정적으로 1820년 포르투갈에서 자유주의 혁명을 일으킨 세력들이 주앙 6세의 귀국을 강력히 요구했기에 1821년 주앙 6세는 아들에게 브라질을 맡기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죠.

 

귀국한 주앙 6세는 1822년 새로 제정된 헌법에 서명함으로써 포르투갈은 입헌군주주제 국가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에 포르투갈에 불만이 있던 브라질 독립 세력의 지지를 받은 주앙 6세의 아들 페드로 1세가 독립을 선언하여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포르투갈에게 큰 타격이 되었죠. 게다가 영국은 1833년 자국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면서 다른 나라의 노예 무역도 못하게 막아 이것 또한 노예 무역으로 이익을 보던 포르투갈에게 타격이 되었습니다.

 

헌법 개정, 혁명, 쿠테타, 반란, 경제 불황, 식민지(아프리카)의 상실 위기 등으로 혼란 한 시기를 겪은 포르투갈은 1910년 혁명으로 공화정 국가가 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914년에 일어난 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전하는 등 그 이후로도 혼란은 지속되었고 1926년 쿠테타가 일어나 제 1공화국은 막을 내립니다. 새로 수립된 정부에서 1928년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재무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그는 1933년 새로운 헌법을 통해 독재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살라자르는 1968년까지 독재를 했고 그가 집권하는 동안 우민화 정책(3F 정책), 농업 중심의 저개발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중립을 지키며 연합국과 추축국을 번갈아가며 몰래 지원했고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을 필사적으로 막았죠. 독재 정부에 불만을 가진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1974년 리스본에서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켰고 이로써 독재체제의 막을 내렸습니다. 혁명의 결과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들도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6년 새 헌법과 선거를 통해 군부가 주도하는 정치 체제가 끝이났고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으나 경제는 회복되지 못해 IMF 구제 금융을 두 차례(1978년, 1983년) 받게 됩니다. 1990년대 중반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포르투갈의 경제는 잠깐 성장했지만 재정적자가 확대되면서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2011년에 세 번째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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