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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석에서 순수한 은을 뽑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현대 기술로는 당연히 별 일 아니지만 조선시대때 까지만 해도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하느냔 하지 못하느냐는 국가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과거 대부분의 나라는 그냥 은광석을 계속 가열해서 그 잿더미 안에 있는 은을 추출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당연히 투자대비 결과물은 시원치 않았고 순수한 은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의 행운, 새로운 제련법의 등장

이런 상황이 반전된 것은 연산군 시절입니다. 어느날 양인 김감불, 노비 김건동이 연산군 앞에서 화학 실험을 진행 했는데, 그들은 금속의 녹는점 차이를 잉요해서 납과 은이 섞여있는 낮은 품질의 은광석 덩어리에서 순수한 은을 뽑아내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는 최첨단의 제련 기술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치와 향락을 즐겨 늘 돈이 부족하던 연산군으로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떡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연산군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함경도의 은광에 이 방법을 적용해서 은을 대량으로 생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호조판서가 이 기술을 민간에도 널리 적용해서 민간 사업자들에게 순도 높은 은을 생산하게 하고 국가는 그것에 대한 세금을 걷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연산군은 그것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여 즉시 시행하게 합니다.

 

김건동, 김감불이 은을 추출하는 장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화학실험이었다.

이로서 사실 조선 왕실이 엄청난 은을 벌여 들였을 법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합니다. 부패로 얼룩진 조선 조정에 뇌물을 내고 채굴권과 면세혜택을 받은 사업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 제련법 그 자체는 혁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대량의 순수한 은이 추출되게 되고 결국 조선 내부에는 은이 아주 많아지게 됩니다.

 

당시 명나라는 은을 고액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교역은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해도부터 의주까지 짐을 실은 수레가 가득하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은 3천냥씩 쥐고 간다" 등의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명 국경일대는 은이 너무 많아 물가가 북경과 다를바 없다" 등의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중종반정과 적폐청산

그러나 조선의 이런 호황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반정에 성공한 중종 정부의 가장 큰 목표는 연산군이 저지른 모든 적폐를 청산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과정에서 은의 대량 생산과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련법과 은 채굴 역시 연산군의 사치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철폐의 대상이 됩니다. 은광 업자들과 상인은 날벼락을 맞았고 조선의 은광 사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잠깐 찾아왔던 조선 상업의 호황기는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사그라들게 되었죠.

일본의 어부지리

정작 이 제련법의 혜택을 본 것은 이웃나라 일본입니다. 일본은 1526년 하카타의 일본 상인이 조선의 기술자 두명을 초청해 조선의 은 제련법을 도입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일본이 조선에서 들여온 회취법을 이용해 은을 제련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일본은 원래 은이 풍부한 편이엇으나 은광에 납이 많이 섞여있는 저품질 은광석이 주로 채굴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서 들어온 이 새로운 은 제련법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이 은을 통해 일보은 포르쿠갈로부터 총포등의 무기를 구입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막대한 은은 얼마 뒤 발생하는 임진왜란의 든든한 군자금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자신들이 개발하고 전수해주고 스스로 폐기시킨 은 제련법 때문에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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