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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억,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 중국, 그리고 이런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바로 시진핑입니다. 곰돌이 푸를 닮은 푸근한 인상 덕분에 곰돌이 푸란 별명을 갖게 됐지만 실제로 그를 곰돌이 푸로 불렀다간 공안에 잡혀갈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엄청난 절대권력을 이룬 시진핑의 일생을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953년 6월 15일 베이징의 중난하이에서 아버지 시중쉰과 어머니 치신 사이에서 2남 2녀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시진핑, 하지만 그에게는 이복형제가 셋이나 더 있는데 그건 아버지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어머니 치신과 재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진핑이 태어난 중난하이는 중국의 최고위층만 살 수 있는 지역인데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시진핑은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금수저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고위급 아버지를 둔 자녀들을 태자당이라고 하는데 시진핑은 태자당이었던 것이죠.

 

고급 주택가에 살며 경비원, 요리사, 가정부까지 두고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시진핑은 엘리트층 교육 시설인 베이하이 유치원과 고위 간부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베이징 81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시진핑은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 시중쉰 때문이었는데 시중쉰은 특히 근검절약을 가풍으로 내세웠으며 일할 때를 제외한 평상시에는 무명옷에 헝겊신을 신고 다녔고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지내도록 요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진핑은 누나가 입던 분홍색이나 꽃무늬 신을 물려받아 학교에 신고 다녀야 했습니다.

 

하루는 학교 친구들이 심하게 놀려 누나의 꽃신을 안 신으려고 하자 아버지는 "물들여서 신으면 똑같다"라며 먹물로 검게 물들여 신발을 신게 했다고 합니다.

 

시진핑이 10살이 되던 1962년 9월 시진핑의 가족은 큰 시련을 맞게 됩니다. 당시 부총리로 있던 아버지 시중쉰이 류즈단 사건으로 인해 부총리에서 해임이 되고 9계급이나 좌천이 돼 멀리 시골 뤄양의 광산 부공장장으로 쫓겨나게 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습니다. 시중쉰은 혁명가 류즈단의 생애를 다룬 장편소설 '류즈단'의 사전 검토를 부탁받게 됩니다. 시중쉰이 류즈단과 친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출간된 이후 소설 속에 나오는 또 다른 인물인 가오강이 미화되었다는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가오강은 마오쩌둥에 의해 반동분자로 찍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었는데 그런 가오강이 미화되었다는 논란이 생기며 사전 검토를 한 시중쉰이 반당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시골로 쫓겨 내려간 뒤 13살이 된 시진핑은 당시 베이징 최고의 명문 101 중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01 중학교는 고위급 간부 자제와 혁명 열사 유자녀를 위해 설립된 학교로 비록 시진핑의 아버지는 좌천되었지만 전직 고관 자녀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입학이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합니다.

 

 

시진핑 가족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66년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이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사상을 배척하고 사회주의를 실천하자는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문화대혁명이지 쉽게 말해 자신의 반대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문화대숙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천만 명이나 되는 홍위병을 앞세워 무려 10년 동안 문화 예술인과 지식인 등 2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당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어쨌든 시진핑의 가족도 당시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버지 시중쉰은 홍위병들에게 끌려와 '반당분자 시중쉰'이란 글씨를 목에 건 채 조리돌림을 당하고 독방에 8년간 장기 연금 조치됐으며 어머니 치신은 500인 반당분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7년간의 감호 조치와 강제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시진핑의 이복 누나 시허핑은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가족이 살던 집은 몰수되어 베이징 외곽의 움막집으로 쫓겨나게 됐으며 101 명문 중학교를 다니던 시진핑은 반당분자 자녀들의 수용소 겸 특수학교로 개조한 25중학교로 강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1969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16살이 된 시진핑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지식청년은 농촌에 내려가 가난한 농민의 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마오쩌둥의 상산샤상 방침에 따라 당시 1,600만 명의 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강제 노동에 투입되게 된 것입니다.

 

시진핑 역시 산시성의 량자허라는 오지에 배치돼 3평 남짓한 작은 토굴에서 살게 됐습니다. 하지만 농촌 생활도 그리 안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촌 주민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기술은 없으면서 숙식까지 제공해 줘야 하는 학생들이 부담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시골로 내려간 많은 학생들이 주민들에게 매를 맞고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를 당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시진핑 역시 큰 고생을 했고 결국 3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모와 이모부의 설득으로 다시 농촌으로 돌아온 그는 심기일전하여 그때부터 농촌 사람들과 잘 지내며 7년간의 하방 생활을 성공적으로 보내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던 1974년 21살이 된 시진핑은 그토록 원하던 공산당에 입당을 허가받게 됩니다. 중국 공산당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으로 시진핑은 입당을 신청한 지 11번째 만에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후에야 드디어 입당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공산당 최하층 관리인 량자허 대대 지부의 서기가 된 시진핑 시진핑은 작은 시골의 서기로 정치적인 걸음마를 시작했고 1975년 문화대혁명이 끝날 즈음 공농병 청강생으로 선발이 돼 중국의 명문 칭화대 화학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됩니다.

 

이로써 시진핑은 7년간의 오지 생활을 마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고 1979년에 뎡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16년간 야인으로 있던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다시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게 됩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한 시진핑 역시 아버지가 힘을 써준 덕분에 겅뱌오 부총리의 비서로 일하게 되며 탄탄대로를 달리게 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1982년에 돌연 사표를 낸 뒤 "기층조직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지방행을 선택해버렸습니다. 이후 25년 동안 지방만을 전전하며 샤먼시 부시장, 푸저우시 서기, 푸젠성 부서기, 푸젠성장 등 자신만의 정치적 자산을 쌓아나가게 됩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동안 시진핑은 지금의 아내 펑리위안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펑리위안과는 재혼을 한 사이로 1980년 무렵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외교관인 커화의 딸 커링링과 일종의 정략결혼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교관의 딸로외국 생활에 익숙했던 커링링은 시진핑과의 답답한 결혼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며 결혼 2년 만에 자연스럽게 헤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1986년, 친구의 소개로 만난 시진핑과 펑리위안은 서로 첫눈에 반해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당시 펑리위안의 집에선 결혼을 반대했었는데 시진핑의 집안이 고위 간부인데 비해 펑의 아버지는 농민 출신으로 집안이 너무 기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펑리위안은 중국의 국민 가수였기 때문에 사진핑이 차기 지도자로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만 해도 '펑리위안의 남편'으로 불리며 아내의 유명세 덕을 많이 봤다고 합니다. 1997년,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제15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에 당선됩니다. 순위는 151명 가운데 151위, 한마디로 꼴찌였습니다. 그 뒤 2007년 당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시진핑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방에만 있었던 데다 워낙 성격이 조용하고 눈에 띄는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07년, 당 대회를 거치며 시진핑은 차기 지도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막강한 경쟁 후보였던 보시라이가 무리수를 두다가 스스로 몰락하고, 이전 주석인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 갈등 속에 계파나 자기세력이 없고 조용해 보이는 시진핑이 차기 최고 지도자로 내정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5년이 흘러 2012년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을 물려받았고 22013년, 제7대 국가 주석에 선출이 돼 중국 최고 지도자로 오르게 됩니다. 시진핑은 한동안 조용한 관리형 주석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다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는 지난 2018년, 급기야 국가 주석을 3연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수정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신이 종신집권할 수 있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호랑이든 파리든 모조리 때려잡겠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펴며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장기 집권을 위한 포석으로 인터넷도 장악해버렸는데, 자유롭게 의견을 올릴 수 있는 구글이나 페이스북, 트위터 등 해외 IT 기업을 축출해 버렸고 자신에게 협조적이지 않은 기업은 가차 없이 규제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시진핑이 곰동이 푸를 닮았다며 곰돌이 푸를 가지고 간접적으로 그를 비판했는데 아예 곰돌이 푸를 못 쓰게 검열을 강화해 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2018년에 개봉한 영화 '곰돌이 푸'는 중국에선 공산당의 검열 조치로 개봉조차 못했다고 합니다.

 

 

시진핑은 중국의 영향력을 전 세계로 넓히겠다며 '중국몽'과 '일대일로'로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김치나 한복이 자신들의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도 나오기 시작했고 홍콩의 민주화 운동도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이후 지난 40년간 유지돼 온 집단 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마오쩌둥 이후 역대 지도자 중 최고의 절대 권력자로 등극한 시진핑,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던 시진핑은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독재자 마오쩌둥의 길을 걷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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