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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사우디 냉전

어쩌면 중동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지역입니다. 현재도 각지에서 전쟁이 진행중이고, 주요 국가들은 갈수록 더 많은 수의 군대를 투입하고, 테러단체들은 국경너머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20세기부터 폭력이 동반되는 심각한 갈등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이 모든 종류의 봉기, 내전, 반란들에 연관 되어 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강력한 라이벌이고, 두 국가의 불화는 중동갈등을 이해하는데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밌는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서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 두 국가는 간접적으로 상대방에게 적대시 되는 나라를 지지하거나 갈등을 선동함으로써 전쟁을 이어 왔습니다. 일종의 대리전을 치룬 것이죠. 그러나 그들의 대리전은 중동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특히 가난한 나라들의 내부에서 일어난 강대국의 힘겨루기는 그 나라의 국가 기능을 상실시켜 버렸습니다.

 

물론 사우디와 이란 모두 이런 종류의 내전이 양측에게 커다란 위협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잠재적으로 엄청난 기회이기도 합니다. 결국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으로 인해 중동 전체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작금의 중동 상황을 이란-사우디 냉전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냉전의 원조는 미국과 소비에트연방 사이의 40년간의 대치였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이 대표하는 이념의 깃발이 세계 전체에 펄럭이는 것을 목표로 경쟁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지만 전 세계에서 대리전으로 충돌하였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독재자와 반란군을 지지하였고, 사로 다른 편에 속한 내전에 개입했습니다.

 

이 원조 냉전국가들이 했던것과 똑같은 일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신 이 두 나라의 목표는 세계 지배가 아니라 중동 안에서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사실 이 두나라의 라이벌 의식은 역사가 깊습니다.

역사적 이유

사우디-이란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 각 국가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0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아랍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붕괴되었죠. 자연스럽게 아랍반도의 수많은 부족들은 패권을 위해 다투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패권다툼을 하던 부족중 하나인 알사드가 아랍반도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1932년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인정 받게 됩니다. 그리고 6년 후, 사우디 아라비아 내에서 막대한 석유가 발견 되었습니다. 곧바로 사우디 왕조는 부유해졌죠. 그 오일 머니로 사막 전반에 걸쳐 도로를 닦고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동맹이 되어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일조하였죠.

 

반면 동쪽 걸프만에서는 또 다른 나라가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우디에 비해서 훨씬 더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란 역시 막대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훨씬 더 많은 무슬림 인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란에 대한 지속적인 외세의 개입은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18세기 부터, 이란은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두 차례의 침략을 받았고, 1953년, 미국은 비밀리에 쿠데타를 일으켜 무하마드 모사드를 축출한 뒤 레자 샤 왕조를 세웠습니다. 미국은 이란을 적극적으로 세속화, 서구화 시켰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는 금방 부패하였고 국민들의 지지를 빠르게 잃어갔습니다. 사우디와 이란의 왕조는 모두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이란과는 달리 사우디 왕조는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미래는 달라졌습니다. 

 

이란의 무슬림들은 이란 왕조의 개혁으로 자신들이 억압받았다고 느꼈고 결국 10여년 뒤 이슬람 혁명이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이란의 이슬람 혁명군은 정권을 전복하고, 1979년 루홀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수립합니다. 루홀라 호메이니는 무슬림 성직자였으며, 서구화와 세속화를 반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거대한 국제 사건인 동시에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이란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 사우디에서도 일어날 것을 걱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루홀라 호메이니가 사우디 국민을 선동해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도록 만들지도 몰랐으니까요.

종교적 이유

종교적 위협 또한 존재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우디 사람들은 무슬림의 수장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등장으로 이란이 그들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분열의 이유는 사우디 아라비아 국민들은 대부분이 이슬람 수니파였고 반면 호메이니를 비롯한 이란 사람들음 대부분 시아파라는 점입니다. 

 

이란에게 위협을 느낀 사우디는 미국과 동맹을 더욱 강화하였고 걸프에 있는 왕조들과 GCC(걸프협력회의)를 결성했습니다. 갈등을 위한 기반이 마련된 것입니다. 1980년 9월, 사담후세인의 이라크는 이란을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라크는 멀리가지는 못했습니다. 의외로 이란의 방비는 튼튼했고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며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란이 이기기 시작하자, 사우디는 패닉에 빠졌고 이라크를 지원했습니다. 사우디는 이란에게 돈, 무기, 보급 수송의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이라크를 개발하는 것은 사우디에게 중요하였는데 이는 이란이 촉발한 사상적 급류를 막기 위한 벽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우디는 1988년까지 이라크를 지원하였습니다. 이 때 당시 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이란은 사우디를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불화는 증폭되었습니다. 그리고 15년 후 이라크는 다시 대리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사담 후세인을 잡습니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모두 이러한 일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이라크는 두 국가의 완충지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승리 이후 이라크에서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발생한 이라크 내에서 안보공백은 전면적인 내전을 촉발하게 됩니다. 정부 없이, 무장된 군대는 이라크의 통치권을 얻기위해 투쟁했고 국민들은 분열했습니다. 수니와 시아파 군대가 갑자기 전국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군대들은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었으며 혼란 가운데 권력을 얻기 위한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군대들은 사우디와 이란을 위한 대리인들 이었습니다. 사우디는 수니파에게 무기를 보냈고 이란은 반대로 시아파에게 무기를 보냈습니다.

 

대리전은 이라크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튀지니에서, 사우디가 독재자를 지원해주는 동안 이란은 시위를 부추겼고, 바레인에서 이란은 정부를 전복할 시아파 지도자를 지원하였습니다. 리비아, 레바논, 모로코에서 일어난 모든 종류의 내전, 반란, 소요사태 등에 이란과 사우디가 모두 개입되어 있습니다.

 

예맨에서는 사우디 군대가 현장에서 중앙 정부를 돕고 있고 이들은 후티라 불리는 이란(Iran)반군 단체와 싸우는 중입니다. 시리아에서는 이와 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죠. 이란 군대가 시민군과 함께 싸우고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헤즈볼라나, 시리아 대통령의 지원을 받는 단체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싸유는 대상은 사우디의 지원을 받은 수니파들 입니다.

 

냉전이 계속되면서 중동은 점점 더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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