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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도 지포 라이터의 명성은 들어 봤을 것입니다. 라이터의 뚜겅이 열릴 때 나는 청명한 소리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비흡연자도 지포 라이터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인데요. 오늘은 오일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지포라이터의 역사를 간단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포라이터의 창시자 조지 그랜트 브레이스델은 1895년 6월 5일, 미국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 브래드포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제가 많았는데, 그의 부모는 아들을 정신 차리게 하고 싶어서 사관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조지는 2학년 때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퇴학당한 조지에게 집에 들어오고 싶다면 스스로 돈을 벌라고 명령합니다. 결국 아직 미성년자인 조지는 친척이 운영하는 가솔린 엔진 회사, 브레이스델 머시너리 컴퍼니에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된 일이었지만, 그는 기계를 제조하는 것에 대한 기본 지식을 배우며 경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브레이스델 머시너리 컴퍼니를 맡아서 운영하게 될 정도였죠. 그러던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뉴욕 증권 시장이 대폭락한 사건, 일명 검은 목요일로 인해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됩니다. 이때 조지는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 오일 회사를 공동으로 인수하여 브레이스델 오일 컴퍼니의 공동 소유주가 되는 등 꽤 성공적인 사업을 해나갔습니다.

 

1932년 어느 날, 조지는 친구인 딕 드레서와 함께 브래드포드의 펜힐 컨트리 클럽에서 열린 디너 댄스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한참 동안 춤과 정치 이야기에 빠져있던 조지는 잠시 담배를 피기 위해 테라스로 나갔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친구 딕이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딕이 부피가 제법 크고 투박한 오스트리아산 황동 라이터를 사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라이터는 오스트리아의 발명가 칼 아우어 폰 벨스바흐가 개발한 부싯돌 방식의 가연성 가스라이터였습니다. 훌륭한 제품이었지만 크기가 너무 커서 불을 붙이려면 두 손을 사용해야 했고 약한 소재 탓에 부서지기 쉬었습니다.

 

조지는 라이터가 작고, 가볍고, 예쁘다면 분명 인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지는 우선 오스트리아 라이터 제조업체로부터 독점 수입권을 따냈습니다. 기존의 라이터를 조금 개선하여 판매를 시작할 계획이었던 겁니다. 이후 라이터 뚜껑을 크롬으로 도금하는 등 개선을 시도했지만, 그가 느끼기에 기존 라이터에 결함이 너무 많아서 결국 판매를 포기하고 새로운 라이터를 직접 개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33년, 조지는 본격적인 라이터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조지의 목표는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큼 라이터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황동을 주재료로 한 새 라이터는 뚜껑을 연 뒤에도 한 손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경첩으로 라이터 몸통과 뚜껑을 이어 붙였고 바람 속에도 불이 잘 버틸 수 있게 오스트리아 라이터의 굴뚝 디자인은 그대로 도입했습니다.

 

그렇게 조지가 만든 최초의 라이터, 지포 1932 레플리카가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제품명은 그냥 조지가 좋아하는 발음을 붙인 것인데 그것이 회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지는 고장 나면 무조건 평생 수리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초기에 지포 라이터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죠.

 

조지는 포기하지 않고 지포 라이터의 디자인을 계속 수정해서 개량된 버전을 계속해서 출시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행운이 찾아 왔습니다. 1936년, 브레드포드의 정유회사였던 켄달 오일 컴퍼니는 자신의 회사를 알릴 목적으로 켄달 오일 컴퍼니 로고가 부착된 지포 라이터 500개를 주문했는데 이게 의외로 마케팅 효과를 낸 것입니다.

 

한 번 소지하면 오랫동안 사용하는 지포 라이터에 새겨진 무언가는 소유자가 가는 곳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홍보하는 걸어 다니는 광고였던 겁니다. 이후 지포 매뉴팩처링 컴퍼니는 지포 라이터의 몸통 부분을 광고에 활용하여 큰 수익을 거두게 됩니다. 기업 광고뿐 아니라, 군대, 동물, 스포츠 등 다양한 디자인이 각인되어 출시되었는데, 사용자들로 하여금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전시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포는 일반인용 제품의 제조를 중단하고 군사용 지포 라이터의 생산만 하게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황동 대신 등급 낮은 강철로 만들어야 했으며 크롬이나 니켈 도금도 할 수 없어서 검은색 페인트로 칠한 뒤 열처리를 하여 표면에 균열감이 생기도록 마감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번쩍번쩍하는 지포 라이터의 빛깔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대신 빛이 반사되어 적에게 노출되는 일이 없어져 오히려 전쟁용으로는 제격이었습니다. 그렇게 군용품으로만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에는 생산량이 300만 개에 이르렀습니다.

 

시간이 흘러 미국이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지포 라이터는 또다시 전쟁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때 또다른 행운이 지포를 찾아오는데 월남전에 참전 중이던 미군 안드레즈 마르티네스 상사는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았으나 왼쪽 가슴 쪽 주머니에 넣어둔 지포 라이터가 총탄을 막은 덕분에 다행히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던 겁니다.

 

게다가 이 라이터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 했죠. 실제로 이 사건은 미국의 시사 매거진 LIFE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지포 역시 이를 광고에 적극 활용했고 덕분에 지포 라이터는 전 세계 라이터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의 전쟁이 지포 라이터의 명성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1978년 10월 3일, 조지가 세상을 떠나고 지포는 그의 두 딸이 물려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지포 라이터가 대중매체를 통해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이하드, 유주얼 서스펙트, 콘스탄틴 등 수많은 영화와 연극, TV쇼에 등장하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지포 라이터는 1988년에 누적 판매량 2억 개를 돌파했고 1996년에는 3억 개, 2012년에는 5억 개 그리고 2020년에 6억 개의 누적 판매량을 돌파했습니다.

 

지금까지 지포 라이터의 역사를 살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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