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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외환위기

90년대 초반은 여전히 많은 국민들에게 대한민국의 리즈시절로 기억됩니다. 군사정권 하에서 일어난 급격한 경제성장의 달콤한 과실이 무르익은 때 이기도 했고, 87년 체제이후 민주화를 통해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더 시절이기도 핬습니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오래 가지 못햇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97년 외환위기가 터지게 된 것입니다.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환율관리의 실패였지만 그 피해는 국민들이 감수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재벌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대마불사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국의 호령하던 굴지의 대기업들이 무기력하게 부도를 맞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국내 최고의 기업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차 인수를 발표합니다. 때는 IMF 체제 편입 1주일도 지나지 않은 1997년 12월 8일 이었습니다. 당시 쌍용차는 SUV 라인에서 독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체어맨이라는 기함은 상당히 마니아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함으로써 쌍용차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아마 이 시기즈음에 나온 대우 엠블럼이 붙어있는 무쏘와 체어맨을 기억하실 겁니다. 

 

 

대우 엠블럼이 붙은 MUSSO

김우중와 대우그룹

대우그룹을 이끌던 김우중 회장은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어찌됐건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던 사람이고, 트리코트 원단과 와이셔츠 수출로 그룹의 기틀을 세웠기에 '트리코트 김'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전장에 나선 장수처럼 앞장서서 그룹을 진두지휘 했고 효율성을 중시하여 음식을 먹는 시간 조차도 아깝게 여겼다는 워커홀릭 이었습니다.


유창한 영어실력과 대단한 친화력, 처세술 등을 활용하여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한, 그야말로 역사상 가장 유능한 상사맨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IMF라는 시대의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그가 일군 대우라는 그룹도 몰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대우는 재계서열 2위의 재벌이 되기까지 했지만 세계경영이라는 슬로건에 비해서 내실이 약한 편이었습니다. 당시 재벌들이 대부분 대단한 도전 정신으로 밀어 붙이는 기질이 충만했다지만 대우는 그 안에서도 특히 유별났습니다.


대우는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렸습니다. 저렴한 가격에 부실기업을 사들여서 키우는 것이 김우중의 스타일이었고 이는 리스크가 상당히 큰 공격적인 경영방식이었죠. 그런데 IMF는 그런 종류의 경영방식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IMF는 고금리 정책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차입을 통한 확장경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리스크가 터져버린 것이죠.

시중금리는 일거에 30% 까지 치솟아 오르며 은행에서 돈을 빌린 기업들은 순식간에 부도의 위기에 내몰리게 됩니다. 실제로 고금리 정책 이후 3000여개의 국내 기업들이 도산을 피하지 못했죠. 그리고 가장 공격적으로 대출을 활용해 온 대우 역시 타격을 받게 되었죠. 그러나 김우중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겠다는 듯 더욱 더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대우의 쌍용차 인수 기사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결정입니다. 대우는 쌍용차를 인수하며 모든 차종을 생산하는 종합 자동차 회사가 되었지만 쌍용차 인수와 함께 떠안은 부채와 적자폭은 엄청난 리스크로 대우에게 돌아왔습니다. 사실 쌍용차 인수라는 무리수만 아니었으면 대우그룹 전체의 해체까지는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김우중의 한계

사실 지금에 와서 김우중의 삶을 돌아보면 그는 세일즈맨으로서는 초일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기업경영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던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대우그룹 해체의 가장 큰 원인은 외환위기라는 외부에서 밀려온 재해 였으나 그런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기업이 된 삼성, 현대, LG 등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김우중 본인 역시 자신의 가장 큰 실수가 야심이 너무 컸다는 것, 특히 자동차 부문에서 과욕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김우중 개인의 성격이나 기질을 생각해 보면 그는 대우를 일본의 미쓰비시상사, 미쓰이물산같은 종합상사 기업으로 육성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타고난 상사맨인 그는 오히려 종합상사에 사활을 걸었으면, 트리코트 원단을 수출해 기업 설립 자금을 벌어들였던 대우실업은 세계적인 종합상사로 거듭났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종합 상사

실제로 대우가 만들던 제품들은 대부분 대단한 기술이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기술은 사오면 된다'라는 식의 사고 방식으로는 결코 일류 제조업 기업을 이끌 수 없었습니다. 뭐든지 사고 팔수 있다는 식읠 마인드는 상사맨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죠.

대우그룹의 최후

이후 김우중은 삼성그룹과의 빅딜로 위기를 타개해 보고자 합니다.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교환하는 방법이었죠. 그러나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대우 내부에 관계자가 대우전자의 부채 상황에 대해 삼성에 고발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때 삼성그룹은 삼성생명의 자금동원력에 힘입어 삼성차를 쳐내는 선에서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죠.

 

삼성과의 빅딜이 무산되자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부는 결국 대우그룹을 워크아웃 명단에 포함시켜 금융기관 채무를 동결시킵니다. 워크아웃 발표 1년 4개울 뒤인 2000년 11월 8일, 대우그룹은 돌아오는 어음을 갚지 못하고 최종부도 처리 되었습니다.

 

대우 부도 기사

세계경영을 외치며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해 오던 대우그룹의 초라한 최후였습니다. 4대 그룹으로 불리던 국내 2위 대재벌 대우의 몰락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우중이 마지막까지 미련을 가지던 대우자동차는 그 브랜드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찌감치 대우차와 대우전자를 정리하는 등의 구조조정에 돌입했더라면 지금도 대우는 우리 경제의 한 축으로 큰 힘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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