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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인도를 가운데 두고 동 파키스탄과 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어져서 독립하게 됩니다. 서파키스탄은 중동에 밀접하게 붙어있고 동 파키스탄은 동납아와 인접해 있었죠. 비록 같은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지만 동, 서 파키스탄의 공통점이라고는 이슬람을 믿는다는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공통점이 없다기 보다는 종교 이외의 모든 것이 다르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인종부터가 서파키스탄은 아랍계였고 동파키스타는 동남아에 가까운 인종이었습니다. 생김새 뿐 아니라 언어도 서로 달랐죠. 단순히 다르기만 한 것이라면 좋겠지만 양 지역간에는 정치적인 격차가 존재 했습니다.

 

서 파키스탄은 정치와 군사등을 포함한 국가 권력 대부분을 차지했죠. 동 파키스탄은 권력에서 소외되게 됩니다. 그런데 동 파키스탄은 아주 풍요로은 지방이었습니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해발 3m 내외의 평지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국토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죠. 평균기온은 30도에 이르고 아무리 추워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땅은 당연히 엄청난 농업 생산량을 자랑했습니다. 동 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전체에서 60% 이상의 자원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불균형 탓에 예산은 전체의 25% 밖에 배정되지 않았죠. 나머지 75% 예산는 권력을  가진 서 파키스탄에 돌아갔습니다. 동 파키스탄 사람들이 열받을만 한 일이죠.

 

1970년 11월 12일, 동 파키스탄에 초대형 태풍인 볼라가 상륙합니다. 태풍의 피해는 심각해서 동파키스탄 내에서만 사망자가 50만명을 헤아릴 정도였죠. 당연히 세계 각국에서 구원의 물길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도착한 구호품을 태풍 피해를 전혀 받지 않은 서파키스탄에서 차지해 버립니다. 그것도 거의 대부분의 구호물자를 말이죠.

 

안그래도 정치적 불평등에 시달렸던 동파키스탄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분리독립 운동을 시작합니다. 사실 동파키스탄의 인구가 6,500만명이었고 서파키스탄 인구가 5,800만명 이었기 때문에 만약 민주적으로 투표를 통해 독립을 결정하게 된다면 동파키스탄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 자치를 주장한 아와미 연맹이 313석중 160석을 차지하며 과반수를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출신 칸 대통령은 총선을 그냥 무효화 해 버리죠. 

 

1971년 3월 7일, 아와미 연맹의 대표 라만은 동 파키스탄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에 서파키스탄은 군대를 동원해 라만을 체포하고 독립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합니다. 

 

서파키스탄 군대는 시위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동 파키스탄의 시민들을 학살했고, 대학생부터 농민들까지 엄청난 인구를 학살했습니다. 잔인한 고문과 강간이 포함된 끔찍한 학살이었죠. 이때 학살당한 인구가 100만이라는 추정치가 있습니다. 서파키스탄 군대는 이 학살을 '서치라이트'라는 작전명으로 불렀습니다.

 

동파키스탄 국민들은 서치라이트를 피해 인도 국경을 다시 건넙니다. 종교의 이유로 넘었던 국경을 다시한 번 더 넘게 된 것이죠. 이 때 인도 국경을 넘어서 인도로 들어선 동파키스탄 주민이 1,000만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인도 입장에서는 자국에서 쫓아낸 무슬림이 다시 자국으로 들어오는 것이 탐탁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국가 내부의 일이라 개입할 명분이 없었죠. 그런데 피난민들을 추격해 온 서파키스탄 군대가 겁도없이 인도 국경 안에서 학살을 지속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는 인도에게 확실히 개입할 명분을 심어준 셈이었죠.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파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를 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인도는 파키스탄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 선포후 2주 만인 1971년 12월 16일 서파키스탄이 항복하고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하게 됩니다.

 

이 때 독립한 동 파키스탄이 바로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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