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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미군정의 토지개혁

1945년 원폭투하 이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게 되고, 한반도의 남쪽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진주하게 됩니다. 미군은 한국내 남아있던 일본의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합니다. 미군은 미군정 산하 신한공사로 이관된 일본인 소유의 토지들을 이후에 다시 한국인에게 매도했습니다. 대부분은 그 땅을 경작하던 소작농 들이었죠.

 

매도 조건은 매년 생산액의 20%을 소작료로 내면 15년 후 자기 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소작료는 지주와 소작농이 추수한 곡식을 반씩 가져가는 형태였습니다. 소작농은 거깅 종자 비용과 소를 비롯한 여러 농기구도 빌려야 했기 때문에 보통 전체 생산량의 70% 정도를 지주에게 소작로로 지불하는 것과 마찬가지 였습니다.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 소장이 토지개혁 관련 법안에 서명하는 모습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군정의 매도 조건은 그야말로 혁신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전체 농민의 24% 정도가 자기 땅을 가진 자영농으로 변신합니다. 덕분에 한국 내에서 미군의 이미지도 상승했죠.

토지개혁의 이유

미군정 당시 이 토지개혁을 추진한 사람은 울프 라데진스키라는 소련 출신의 미국인이었습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죠. 

 

레닌과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 공산당이 얼마 되지 않는 인원수로 소련을 접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소련지역의 농민들이 전폭적으로 그들을 지원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공산당은 점령한 영토마다 지주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분배를 해 줬죠. 그것을 통해서 대다수의 농민들을 열렬한 공산당 지지자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농민들의 지원을 얻고 나니 자연스럽게 병력이 보충되고 식량보급 문제가 해결 되었죠.

 

1940년대의 한국도 소련과 별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스니다. 지주들은 앞서 말한 것 처럼 70%의 살인적인 소작료를 뜯어내고 있었고 억눌린 소작농들이 많이 있었기에 공산주의 성장하기 너무나 쉬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미군정은 이런 사정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 내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토지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우선 임시방편으로나마 일본 소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의 토지개혁을 실시 한 것입니다. 임시방편이었던 이유는 일본 소유의 토지보다 훨씬더 큰 규모였던 한국 지주 소유의 토지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 수립 이후의 토지개혁

남한의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 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하는데 농림부 장관에 공산주의자에서 전영한 좌익진영의 조봉암을 발탁한 것입니다. 조봉암은 이승만이 하는 모든 일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인물이었는데 반대파를 전격적으로 장관에 임명 한 것입니다.

 

조봉암은 장관이 된 직후부터 자신의 소신이던 농지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그 내용은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9천평 이상의 토지는 모두 유상몰수해서 소작농들에게 분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은 연 30%의 소작료를 5년만 내면 자기땅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정의 조건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토지개혁은 고작해야 4개월이라는 짧인 시기동안 완료되었습니다. 1949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고, 농지개혁으로 저가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주들에게는 적산공장 불하 또는 국가사업에 우선 참여권을 주는 식으로 보상을 해 주며, 지주 재산이 산업 자산으로 전환될 수 있도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한 전체 토지의 대부분은 자기땅을 가지고 경작하는 자영농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파란선은 전체 농민, 빨간선은 자영농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졸속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만 한 이 토지개혁은 국내 지주들의 자산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해 훗날 한국의 산업화가 이루어지는데 큰 영향을 끼치기도 헀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건 바로 한국전쟁 당시의 일입니다.

한국전쟁

토지개혁을 단행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벌어집니다. 남한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북한 공산당은 이승만 정권이 실시했던 토지개혁으로 모두 무효화 시키고 모든 땅르 무상몰수해서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하게 됩니다.

 

겉으로만 봤을 때, 이승만 정부의 유상분배 보다 공산당의 무상분배 방식이 농민들 입장에서 좋아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은 무상분배한 토지의 27%를 세금으로 내게 하였고, 전쟁중에는 실제로 50% 가까운 산출물을 걷어 갔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분배받은 토지는 영원히 농민의 것이 될 수 없고 공산당 소유의 땅에 소작을 붙여 먹는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 입장에서 공산당의 무상배분은 그다지 좋은 제도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토지개혁이 미리 실시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농민들이 지주들 아래에서 신음하던 상태였다면 소련의 경우가 그랬듯 수많은 농민들이 공산당의 지원 세력으로 변모헀을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개혁을 이미 경험한 농민들은 한국전쟁 기간동안 공산당에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토지개혁은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한강의 기적

토지개혁의 성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휴전이후 이승만 정권의 토지개혁법 대로 다시 농지를 돌려받은 농민들은 남다른 교육열을 가진 민족 답게 과거보다 남는 재산을 자식 교육에 쓰게 됩니다. 

 

이 교육의 성과들은 각지에서 개천의 용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렇게 성장한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토지개혁은 훗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토지개혁이 이뤄진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면 일본과 대만뿐이었다고 합니다.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등 훨씬 땅이 넓고 자원이 풍부해서 성장이 용이했던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대만과 일본이 한국과 함께 급속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토지개혁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지주들을 제대로 정리 못하고 국가적이 경제 위기를 계속해서 맞이하고 있는 남미의 사례를 살펴 보아도 토지개혁은 역시 신의 한 수가 맞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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